고려 현종 – 고려판 세종대왕. 그의 생애와 업적

고려 현종 – 고려판 세종대왕. 그의 생애와 업적



고려 현종 – 생애와 업적 알아보기

고려 현종 관련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고려거란 전쟁의 주인공 중 한명인 고려 현종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주요 이력

현종(顯宗)은 고려 제6대 왕으로,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로 알려졌습니다. 보위 즉위 이전의 작위는 대량원군이었고,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묘호는 선릉(宣陵), 불교 승려 시절 법명은 선재(禪齋)이었습니다. 그는 태조의 아들 안종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안종 왕욱과 경종의 계비 헌정왕후의 사통으로 출생한 현종은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5촌 조카이자 이종사촌 형인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거란의 두 차례 침입으로 피난을 다녀온 현종은 비극적인 초년 시절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침착하게 대처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는 또한 전후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정변 이후 쇠약해진 왕의 힘을 키우기 위해 지방세력을 규제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끌었으며,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습니다.

현종은 오랜 여요전쟁의 여파로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했고, 초조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교종 대사찰인 현화사 건립을 지시했습니다. 또한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또한 1029년 8월에는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아올리는 등 고려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1011년 8월에는 개경의 황성을 증축하고 장락궁에 새로 황성을 쌓았습니다.

현종의 정치적 활약

고려 제6대 왕인 현종은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왕위 계승과 정치적 안정화: 현종은 강조의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전의 폐위된 왕의 치뤘던 혼란을 해소하고,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였습니다.
  • 거란의 침입 대응: 거란의 두 차례 침입으로 인해 현종은 피난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전쟁에서는 침착하고 대처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 강화: 현종은 전후 고려의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또한 중앙집권화를 이끌었습니다.
  • 고려실록 재편찬과 국방력 강화: 여요전쟁의 여파로 소실된 고려실록을 재편찬하고, 거대한 나성을 쌓아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 국가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문화 및 종교정책: 초조 대장경의 간행과 현화사 건립을 통해 문화와 종교의 발전을 촉진하였습니다. 또한 유교의 진흥에도 힘써 설총과 최치원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문묘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이처럼 현종은 정치, 국방,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현종의 생애

즉위 전

고려 현종인 왕순은 성종 11년(992년) 음력 7월 1일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왕욱(훗날 안종으로 추승)이었고, 어머니는 헌정왕후 황보씨였습니다.

현종의 출생은 가계도가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왕욱과 헌정왕후는 삼촌과 조카 관계에 있었으며, 그들 간의 관계는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라 불륜 관계였습니다.

헌정왕후는 원래 고려 국왕인 경종의 4번째 왕비였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사망하고 나서 헌정왕후는 왕욱과의 관계를 통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에 매우 큰 문제였으며, 왕욱과 헌정왕후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왕욱은 귀양 보내졌습니다.

현종이 태어난 후 헌정왕후는 바로 사망하였고, 현종은 성종의 명령에 따라 보모나 유모에게 맡겨졌습니다. 나중에 현종은 성종의 명령으로 궁에 들어와 성종과 대면하였는데, 그때 현종은 성종을 “아비, 아비”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성종은 동생 헌정왕후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면서 현종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종은 왕욱과 함께 사수현에서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후에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현종이 왕좌에 올라가기 전의 생애였습니다.

출가 & 탄압

왕순이 대량원군으로 봉해진 후, 목종 6년에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이는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가 있었는데, 왕순을 숭교사에 보내어 승려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이모의 손에 끌려가며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숭교사에서는 자객들의 침입으로 인해 위험에 처했습니다. 고려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신혈사로 거처를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왕순의 목숨을 노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는 왕순을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그를 대피시켰습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침대를 배치하는 등의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1009년에 서북면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강조의 정변) 왕위에 올랐습니다. 강조는 재위 초기에는 왕순을 견제하고 실권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왕순은 출가하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숭배사와 숭교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즉위

거란의 재침입

현종이 즉위한 이후, 고려는 거란의 재침입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하여 다시 한번 침입했습니다. 강조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서지만 결국 패하고 개경이 점령되었습니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을 갔다가 환도했습니다. 이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피난 중에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는 등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또한, 이때에는 공주에서 머물며 왕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중에는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후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되었습니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에는 고려 중앙정부가 실질적으로 와해되었고, 각 지방의 장수들이 거란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이런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고려의 안전과 안정을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걸었습니다.

무인 세력과의 갈등

제2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인해 군비가 크게 증가하면서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종은 1014년 11월에 경군(京軍) 무신들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고, 상장군 최질과 김훈 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현종 앞으로 난입하여 장연우와 황보유를 매질했습니다. 이들은 거란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데도 불구하고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이에 현종은 일단 이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하겠다는 뜻으로 서경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잔치가 진행되던 중에 무신들이 술에 취하자 이들을 주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고, 이로 인해 무신들 사이의 문치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거란은 이 사건을 탐지하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을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고려는 내부적인 갈등과 거란의 위협을 동시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입

1018년에 거란이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했지만,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귀주대첩)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다시 한 번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 후, 1022년에는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습니다. 또한 이 기간에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가체제를 강화하고 정비함으로써 안정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생애 후반

현종은 경제 정책 측면에서 농업과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와 목축을 촉진하는 감목양마법을 제정했고, 조세의 균등을 추구하고 식량 안정을 위해 양창수렴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고려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현종은 세력 기반이 취약했던 만큼 외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국력을 강화하는 한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외교를 통해 안정을 추구하고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1031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한 현종은 고려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이며, 시호는 원문입니다. 그의 통치는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였으며, 그의 노력과 정책은 고려의 발전과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마치며…

여기까지가 고려 현종 관련해 알아본 내용이었습니다. 공민왕과 더불어 고려의 성군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현종. 강조의 정변과 거란이 침공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왕권을 강화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민생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왕이었습니다.

현종에 대해 알고 고려 거란전쟁 드라마를 보신다면 더욱 재미있게 시청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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